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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지역의 신석기문화(東北地域의 新石器文化)역사 및 고고학 2022. 2. 9. 09:04
한반도에서 동북지역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와 함경남도를 비롯해 양강도 일부가 속한다. 동북지역은 중국 동북지방 · 러시아 · 동해에 접해있으며, 서북지역과는 낭림산맥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산지가 매우 많고, 깊고 폭이 좁은 계곡이 많이 형성되어 있는 지형이다. 전체적으로 기복은 심하지 않은 편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형의 기복이 가장 심하고 해발도 높다. 해안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해안선은 단순하지만, 큰 만을 형성하고 있다. 식물대는 북부 온대림과 아한대림(亞寒帶林)에 속한다. 수자원은 북쪽에 두만강이, 남쪽에는 작은 하천이 있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동북지역의 유적은 두만강 주변과 구릉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내륙 유적군과 해안과 도서지방에 위치하는 해안유적군으로 나누어진다. 유적의 종류는 패총, 주거지, 포함층 등이 있다.
동북지역의 토기편년은 연구자에 따라 다른 편년 안이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충서 발굴이 행해진 나선 서포항유적의 층위를 기준으로 문양의 변천, 기종의 증가 등으로 크게 5 시기로 구분하였다. 전기 전반은 출토 토기가 적어 구체적인 양상은 알 수 없지만, 구연부가 직립 또는 내경하는 평저 심발과 연속 자돌(刺突)한 단사선상의 점열문을 특징으로 한다. 전기 후반은 호가 초출하고, 심발이 대형화된다. 심발은 구연부가 외반하면서 최대경이 동부에 있는 호와 같은 것도 나타난다. 문양은 자돌계 이외에도 침선문, 압인문 등이 있으며 각각 단독 또는 복합 시문된다. 전기 전반보다 기종 문양 모티브가 증가한다. 전기 후반의 특징으로는 압날능형문(押捺菱形)과 자돌단사선문의 복합문과 호의 출현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은 동해안지방에도 나타난다.
전기 전반과 전기 후반의 과도기적 단계로 비후구연(肥 厚口緣), 구순각목, 삼각형의 압날문(押捺文) 등을 특징으로 하는 나진, 보이스만 2 유적이 있다. 이 유적들은 전기 전 · 후반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 위에서 열거한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즉 전기 전반과는 문양, 전기 후반과는 기형과 문양이 각각 유사하다. 이와 같은 연속자돌문 토기와 압날능형문과 자돌단사선문의 복합문토기는 극동지방의 초기 신석기시대에 나타나는 것이다. 또 이 토기들은 융기문토기와 동반하는 경우도 있어 주목되나, 현재 동북지방에는 아직 융기문토기 출토 예는 없어 정확한 양상은 알 수 없다. 따라서 이 시기의 토기가 시기적으로 전기 전반보다 상향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실정이다.
중기가 되면 두만강유역과 남쪽에도 유적이 나타난다. 두만강유역의 토기는 해안지역과 같은 양상이지만, 남쪽에서는 삼부위시문토기와 유사한 것(김책 쌍포동유적)과 원저의 완에 자돌의 점열문과 횡주어골문 등이 시문된 것(금호지구 강상리유적)이 출토한다. 이와 같이 남쪽에는 2개 유적이 존재하지만, 각각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편, 해안지역과 내륙지역에서는 2개 유적과 비교해 기종 · 문양이 풍부해진다. 기종에 있어서는 심발, 호 이외에도 천발, 파수가 붙은 토기 등이 있고, 문양의 시문기법은 유사하나 융대문과 와권문(타래문)이 초출한다.
후기는 기종에 있어서 중기와 같은 양상이지만, 심발, 천발(淺), 완 등이 다양해진다. 문양은 중기에 나타났던 자돌문계, 침선문계, 융대문, 번개문, 유정문이 더해진다. 후기의 침선문은 중기보다 조잡해진다. 번개 문은 삼각형, 능형, 사각형의 구획 안에 침선 또는 점선을 충전한 것으로 단독 시문된다.
말기는 출토 토기가 적어 구체적인 양상은 알 수 없으나, 기종에 있어서는 큰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문양은 거의 무문양화 되지만, 후기까지 나타났던 융대문의 위치가 동부에서 구연부로 이동해 나타난다. 번개문은 후기와는 달리 침선문과 복합된 것과 구획 안이 무문인 것이 있다. 이와 같이 동북지방은 전기에는 중국 동북지방이나 시베리아 · 연해주 등의 극동지방과의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또 전기 후반의 특징이기도 한 호와 압날능형문과 자돌단사선문의 복합문은 동해안지방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나, 어로구 조성의 차이 등으로 보아 그 관련성은 강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기가 되면 동북지방에서는 큰 변화가 보여 극동지방보다는 오히려 한반도 서북지방과 관련성이 나타난다. 이것은 유적의 입지에 있어서도 나타나 해안에 집중되어 있던 유적이 두만강 중 · 상류역에 나타나는 것과 타래문, 융대문토기의 등장에서도 알 수 있다. 또 남쪽에서도 중서부지방의 특징을 가진 청원 쌍청리유적과 강상리유적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시기는 동해안지방이 벌써 삼부위시문토기문화권에 속해져 있는 시기이며 지리적인 조건 등으로 보아 동해안지방과의 영향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후기 이후에는 번개문토기와 융대문토기 등에서 보면, 서북지방과는 중기와 비교해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동북지역의 유적은 동해에 접한 해안유적군과 두만강의 상~하류의 낮은 구릉에 입지한 내륙유적군이 있다. 이 유적군은 생업양상은 입지와 잘 대응하며 유적의 성격도 전자는 패총이, 후자는 주거지 또는 포함층유적이 주체를 점하고 있다. 동북지역의 생업형태를 보면, 해안유적군은 나선 서포 항(21종), 청진 농포동(15종) 유적에서 확인되는 것과 같이 수렵 · 어로의 대상인 포유류의 종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출토하고 있다. 어류의 보고가 없어 정확한 양상을 알 수 없으나, 강치 · 바다사자 등 해서포유류의 획득이 많은 것으로 보아 어로활동도 활발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동물유체의 상세한 시기적인 보고는 없어 정확하지 않지만, 시기가 늦을수록 종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석기 · 골각기의 조성도 동물유체의 변화와 유사해, 전기에는 석촉, 작살, 찌르개, 어망추 등 수렵·어로구가 많이 출토한다. 따라서 이른 시기에는 활발한 수렵 · 어로활동이 행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중기가 되면 앞 시기와는 달리 족제비, 너구리 등 고기가 목적이라기보다는 털과 이빨 등을 획득하기 위해 포획된 동물도 출토하며, 석기, 골각기에서도 석초(石敏), 각초(角敏), 갈돌 갈판과 멧돼지 견치를 이용한 낫 · 조개칼 등 농경과 관련된 도구가 세트로 출토하는 변화를 보인다. 그러나
그 주체는 여전히 수렵 · 어로구로 생업형태는 수렵 · 어로활동에 농경활동이 첨가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같이 중기부터의 변화는 신석기시대 말기까지 계속된다. 즉, 수렵 · 어로활동이 주체이며 농경활동의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내륙 유적군의 생업형태는 아직 해안유적군의 전기에 해당하는 유적이 확인되지 않아 정확한 양상은 알 수 없지만, 중기부터는 유적에서 곰배괭이, 봉상의 갈돌 갈판 등 농경기구와 조리구는 출토되지만, 수확구로 보이는 것은 없는 실정이다. 그리고 남해안지역에서는 어로구로 이해되고 있는 석거(石)가 출토한다. 이 석거는 남해안 지역과 같이 어로구로 사용되었다기보다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출토되는 조합식낫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수렵 · 어로구는 석촉 · 석창 · 어망추 등으로 해안유적군과 비교해 그 양과 종류가 적다. 이런 양상은 해안유적군의 중기 이후와 같은 양상이지만, 그 비중에 있어서는 반대로 농경의 비중이 높다. 동북지역의 생업형태는 수렵 · 어로활동에서 농경 등으로 변천을 알 수 있다. 특히 중기 이후에는 내륙지방에 유적이 분포하기 시작하며 해안지역과 같이 농경활동이 인정되나, 농경활동의 비중에 있어서는 해안유적군과 내륙유적군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것은 유적에서 출토되는 석기조성 · 동물유체와 유적의 입지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해안유적군에서는 어로와 수렵활동, 내륙지역에서는 농경 · 수렵활동이 큰 비중을 나타내고 있다. 해안 유적군의 어로활동은 어류의 보고가 없어 확실한 양상은 알 수 없으나, 출토되는 패류를 보면 내만수 또는 연안수에 서식하는 종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남해안 내만유적군의 전기 양상과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어로활동은 석기조성에서 보면 시기가 늦어질수록 활발해지는 경향을 알 수 있다. 그밖에 가축의 사육도 행해졌다. 동북지방에 있어서는 유적의 입지변화는 다른 지방과는 달리 크게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양상은 동해안지방에서도 확인되며, 중기 이후에는 해안지역에 유적이 증가하는 경향이 보인다. 이것은 동해안지방과 같이 해수면 변동 등 자연환경의 변화 영향이 적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중기 후반에 두만강유역에 나타나는 유적은 자연 환경의 변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서북지역과의 교류 · 이주 등의 관련성에 의한 결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 시기부터 동북지방에서는 토기문화도 서북지방과 유사해지며 농경이 시작되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한편, 주거지의 구조와 변화양상을 살펴보면 평면형태 는 원형 → 방형 → 장방형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내부 구조로는 노지와 저장공으로 추정되는 수혈 외에 별 다른 시설은 없다. 노지의 위치는 중앙이 일반적이지만, 시기가 늦을수록 정형성은 없으나 한쪽으로 치우쳐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노지의 형태는 위석식과 수혈식이 혼재하나, 내륙유적군에 위치한 무산 범의구석유적은 전부 위석식노지가 확인되어 시기적인 변화보다는 유적의 위치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서포항유적 9호주거지에서는 노지가 5기 확인된 점이다. 바닥은 유적의 입지와 시기마다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서포항유적의 경우 전기에는 모두 점토로 다진 후에 불처리를 하였으며, 이후 중 · 후기에 이르면 대부분 불처리를 하지 않고 점토다짐만 한 것으로 확인된다.
출입구시설은 전기에 해당하는 서포항유적 3호주거지에서는 계단식의 구조, 중기의 홍성유적에서는 내부에 경사진 구조와 계단식으로 돌출된 구조, 말기의 금곡 유적에서는 내부에 경사진 구조의 출입구시설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동북지역의 신석기시대 주거지에서는 밖으로 출입구시설을 내었을 경우 계단식의 구조로,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내부에 경사진 구조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상 동북지역은 전기까지는 연속자돌문토기와 아무르편목문토기 등에서 미루어 볼 때 극동지방의 문화권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기부터는 서북지방(번개문토기 · 융대문토기 · 농경활동)을 비릇해 중서부지방 또는 동해안지방(삼부위시문토기)과의 관련성을 엿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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