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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석기시대 농경(新石器時代 農耕)
    역사 및 고고학 2022. 2. 7. 22:13

    사전적 의미에서 농경은 논밭을 갈아 농사를 짓는 행위이고, 농업은 땅을 이용하여 인간에게 유용한 동식물을 길러 생산물을 얻어내는 산업이다. 농경에서는 식물만 포함하고 농업은 동식물 모두가 대상이다. 그러나 신석기시대 농경과 농업은 앞의 사전적 의미와 다소 다르게, 농경으로 정의되고 있으며, 학자들마다 서로 다른 정의를 채택하고 있다.

     현재 한반도 신석기시대 농경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첫 번째는 신석기시대 시작부터 농경이 있었다는 입장으로, 북한에서는 전기의 괭이 농사에서 중기에는 보습 농사로의 발전단계까지 상정하고 있다. 괭이 농사는 뒤지개나 괭이로 땅을 뒤지고 거기에 대해서 씨나 뿌리를 심는 원시적인 농사를 말하며 유적에서 발견되는 괭이, 뒤지개 같은 도구들과 낟알이나 열매를 가공하는 갈판 · 갈돌을 증거로 삼고 있다. 아울러 항구적인 정주생활과 관련되는 움집과 대형 토기 및 저장구덩이의 출현도 농경과 관련된다고 본다. 또한 당시의 밭은 화전으로 일군 것으로 추정한다. 중기부터는 새로이 나타난 돌삽과 돌보습을 근거로 보습 농사를 상정하고 땅을 갈아엎고 이랑을 짓는 발전된 농법이 시작되었다고 보며, 후기에는 보습농사를 바탕으로 곰배 괭이가 호미로 이용되면서 김매기가 진행되었다는 것이 북한 학계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두 번째는 신석기시대는 수렵채집과 어로생활로 생업을 영위하였으며, 농경은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앞에서 언급된 괭이, 보습, 뒤지개 등의 농기구는 농경도구가 아니라 식물 뿌리를 캐거나 땅을 파는데 이용된 굴지구(堀地具)로 파악하며, 갈판도 도토리 등의 야생 식료를 가공하는데 이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기존에 보고된 조 등의 낟알도 재배종이라는 과학적 증거가 제시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세 번째는 절충적 입장으로 신석기시대 전기 후반이나 중기부터 중국 동북지방의 영향을 받아 조와 기장의 재배 가 시작되었다고 보지만 단순히 재배 식물이 존재한다고 하여 당시 사회를 농경사회로 보지는 않으며, 생업 경제에 비중을 기준으로 신석기시대를 수렵채집 경제, 청동기시대를 농업경제로 파악하는 견해가 주류를 이룬다.

     상기한 여러 관점은 농경의 고고학적 증거, 재배 식물의 출현 시점과 전체 생업에서의 비중, 농경의 정의에 대한 연구자의 입장 차이와도 맞물려 있다. 과거에는 수렵 채집과 농경, 획득 경제와 생산경제란 이분법적 사고를 갖고 신석기시대를 연구하였지만 지금은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경사회로의 전환기적 모델을 선택하면서 농경의 정의 또한 바뀌고 있다.

     20세기 전반에 고든 차일드(Gorden V. Childe)는 식물 재배종과 가축의 출현을 신석기 혁명으로 파악하면서 수렵채집과 농경을 대립적, 불가역적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뒤이어 브레이드 우드(Robert Braidwood)가 식량 생산을 농경과 동의어로 사용하면서 수렵채집의 식량 획득과 농경의 식량생산이란 이원적 사고방식이 한동안 지속돼 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의 전이에 대한 생태학적, 진화론적 모델이 출현하면서 수렵채집과 농경이란 단순한 이분법보다 생업 차원에서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풍토로 변하였다. 또한 농경, 농업, 원경, 재배, 순화처럼 사람과 식물의 상호작용과 관련된 용어에 대해서도 학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순화를 모든 생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공생적, 공진화(共進化)의 개념으로 파악한 린도스는 순화를 일 반적인 환경에서 인간에 의한 야생식물의 확산과 보호라 는 우발적 순화, 인간에 의해 변형된 환경에서의 재배와 길들이기라는 전문적 순화, 농업생태에 존재하는 조건에 대한 반응으로 식물의 추가적 진화를 동반하는 농업적 순화로 구분하였다. 포드는 농경이란 용어에 내재된 개념적 모호함을 배제하기 위하여 식량 채집과 식량생산의 개념을 수용하고 후자를 재배와 순화의 2단계로 세분하였다. 또한 식량생산의 방법으로 원초적 농경 · 원경 · 경작지(field) 농경의 세 단계를 설정하였다.

     해리스(Marvin Hanis)는 사람과 식물의 상호작용이란 관점에서 야생식물 채집과 생산(소규모 경작), 재배(체계적 경작), 농업(농사)으로 이어지는 진화론적 모델을 제시하였다. 그의 모델은 사람과 식물 사이의 상호작용이기에 생태적이며, 순화에 관련된 과정과 농업 출현의 결과가 생물학적, 문화적 변이에 작용한 선택의 산물로 추정되기에 진화론적이다. 그는 원초적 농경이란 모호한 용어를 배재하기 위하여 재배를 체계적인 토지 개간 및 경작과 미순화(undomesticated) 작물 파종의 결합으로 정의하였으며, 농업은 순화 작물의 재배에 한정하였다. 해리스의 모델에서는 연속적인 전이과정을 상정하면서도 순화종의 출현을 농경 설정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야생종에서 순화종으로의 전이는 야생 맥류 재배 실험에서 보듯이 수십, 수백 년 정도의 단기간에 형성될 수도 있지만 벼나 아메리카 기원의 작물이 증명하듯이 수천 년에 걸친 장기간의 과정일 수도 있다. 또한 재배라는 용어 자체를 야생종 재배에 한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그리하여 해리스 본인 스스로도 순화를 수렵채집과 농업의 경계로 삼던 기존 견해를 철회하고 야생종에서 순화종으로의 점진적 전이를 상정한 수정 모델을 내놓는다. 여기에서 식물성 식량 생산은 야생종이 우세한 단계(소규모의 개간 경작, 대규모의 개간 경작)와 순화종이 우세한 단계로 구분하고 농업은 후자에 한정하였다.

     스미스는 재배에는 경작과 개간의 의미도 포함되며, 원경은 일반적으로 향신료, 꽃, 과수, 채소 등을 정원에 소규모로 재배하는 것을 의미하며, 원초적 농경이란 용어도 여전히 야생자원에 의존하는 사회에 농경이란 용어 사용 자체가 무리라고 지적하면서 이들 용어가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의 전이과정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대신 포드와 마찬가지로 식량생산을 식량 획득에 대칭되는 용어로 채택하고, 식량생산 단계에서 순화종에 대한 의존도가 30~50%를 넘어서는 농경사회 이전의 단계를 저 차원(low-level) 식량생산 단계로 지칭하였다. 그러면서 저 차원 식량생산의 중간지대는 수렵채집 사회나 농경사회의 부수적 단계가 아닌 독자성과 영속성을 지닌 제3의 지대로 파악하였다. 구석기시대와 후빙기의 수렵채집민은 질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어 양자를 동일한 수렵채집 사회로 통합할 수는 없다는 취지에서이다. 스미스의 중간지대를 벗어나는데, 소요된 시간, 즉 농경사회로의 전이 기간은 북미 동부는 4000년, 멕시코에서는 6000년, 근동은 3000년 정도가 소요되었다.

      전이과정에 대한 명칭에는 견해가 다르지만 해리스와 스미스 모두 생업에서 순화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 단계를 'agriculture'로 지칭하였다. 후자는 농경으로도, 농업으로도 번역되고 있지만 일반인들은 재배 식물의 경작 자체를 농경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학문적 용어로써의 'agriculture'는 농업으로 한정할 필요가 있다. 즉 순화된 작물을 재배하는 행위를 농경, 작물이 생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전환된 시점의 집약 농경을 농업으로 지칭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기준을 따르면 순화된 식물 재배가 시작된 한반도 신석기시대는 해리스의 재배 단계, 스미스의 저 차원 식량생산 단계에 해당되며 순화된 식물의 재배라는 의미에서 농경이란 용어도 사용할 수 있다. 반면 농업이나 농경사회는 청동기시대부터 출현하였다는 절충안을 끌어낼 수 있다. 최근 일본 학자들은 재배의 하위 개념으로서 원경과 농경을 상정하면서 원경은 각각의 식물이 증식, 관리되어 개개로 수확되는 토지이용 시스템, 농경은 집합적인 동시에 대량의 시스템으로 정의하였다. 이 기준에 따르면 한반도 신석기시대와 일본 조몬시대의 작물 재배는 원경에 해당한다. 그러나 원경이란 용어는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 용어가 아니라는 약점이 있다. 해리스는 원경이란 용어를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의 과도기적 명칭으로 사용하는데 반대하였다. 원경은 농경과 동일시될 수도 있고, 소규모 정원 재배와 대규모 논밭 재배를 구분하기 위한 농업 시스템의 독특한 유형으로 간주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농경 기원의 이차적 지역이다. 요서지방에서 기원전 6000년 기부터 재배가 시작되었던 조와 기장이 이후 요동을 거쳐 돌 따비(돌보습) · 연석과 함께 한반도로 전파되었다. 중서부지방에서는 기원전 4000년 전반, 기타 지역에서는 기원전 4000년 후반의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조 · 기장 재배가 광범(broad spectrum) 경제의 한 부분으로 실시되었다. 부산 동삼동 패총 · 진주 상촌리 유적 등의 동남부, 아산 장재리 안강골 · 시흥 능곡동 유적 등의 중서부 모두 조와 기장이 동시에 검출된 것을 보면 기존에 조만 보고되었던 서북한의 궁산 문화 유적에서도 조, 기장이 같이 재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기장이 기원전 4000년 기 후반부터 출현하는 러시아 남연해주의 상황을 고려하면 한반도 동북지방에서도 비슷한 시기 기장 중심의 잡곡 재배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신석기시대에 잡곡이 재배되었어도 당시 사회는 수렵채집 사회의 구조에 머물러 있어 농경사회로 지칭될 수는 없으며 농경도구의 분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잡곡 재배의 채용 또는 농경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진하며, 기후변화, 인구증가, 주민이동 복합성 증가 등을 복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산, 김포의 토탄층에서 발견된 볍씨, 일산 토탄층 출토의 횡주어골문토기와 김해 농소리 패총 출토 이중구 연토기의 태도에서 검출된 벼의 식물 규산체, 옥천 대천리 주거지에서 밀, 보리와 함께 발견된 탄화미를 근거로 늦어도 기원전 3000년 무렵에는 한반도 서해안으로 도작이 유입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식물 규산체 분석의 신뢰성, 벼 자료의 후대 혼입 가능성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어 벼 유체에 대한 직접적인 방사성 탄소연대가 수반되지 않는 한 이들 자료를 신석기시대 도작의 증거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전문적인 식물 고고학자가 분석한 유적에서는 조와 기장만 검출되었을 뿐 이들보다 낟알 크기가 훨씬 큰 쌀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최근에 이루어져 있는 빗살무늬토기의 압흔 분석에서도 볍씨 자국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작물은 교류나 교역의 산물로 출현할 수도 있어 벼 유체의 존재가 도작의 존재를 증명하는 아니다. 따라서 신석기시대 도작은 결정적 증거가 제시될 때까지 존재 여부에 대한 결론을 유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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