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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석기시대
    역사 및 고고학 2022. 2. 6. 23:48

     신석기시대란 기원전 9500년 무렵 전신세에 들어서면서 동물의 가축화와 작물의 재배화가 이루어지고, 도구로서 마제석기와 토기가 발명된 시기로 정의된다. 각 요소의 출현 시기가 지역마다 다소 다르지만, 구미 학자들은 20세기 전반부터 농경의 출현을 신석기시대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왔다. 반면 동북아시아지역에서는 1990년대부터 토기의 출현이 갱신세 말까지는 소급되는 증거가 다수 발견되고 있었다. 가장 일찍 이러한 증거가 보고된 곳은 일본이며, 후쿠이 동굴 · 센부쿠지 유적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아무르 하류에서는 하바롭스크 가샤 · 훔미, 연해주 우스티노브카 3유적 등이, 중국에서는 광서성 증피암, 장시성 선인동 유적 등이 유명하다. 이러한 경향으로 보건대 동북아시아 대륙의 광대한 지역에 걸쳐 토기는 갱신세 말 무렵부터 출현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동북아시아지역에서 신석기시대 개념에 대한 최근 논의는 구석기 · 신석기시대의 경계가 토기의 출현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신석기시대의 시작이 지질상 갱신세까지 소급되며, 구석기 · 신석기시대의 시작과 끝은 획일적이 아니라 지역체 따라 늦게 끝나거나 빨리 시작되고 같은 시간대에 구석기 · 신석기 문화가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문화의 지역 차이와 시간 차이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토기 중심적 시각은 아직 구미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한국의 신석기문화

      한국의 신석기시대도 먼저 토기가 출현하고, 농경의 시작이 다소 늦다는 점에서 동북아시아 전체의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그 시작에 대해서는 현재 제주 고산리 ·  서귀포 강정동 유적 등을 중심으로 고산리식토기 등의 고식토기와 함께 구석기 제작 수법이 남아있는 돌날 · 좀돌날 및 좀돌날 몸돌 · 양면 조정 찌르개 등이 공반되어 출현함이 알려졌다. 요약하면 좀돌날 + 양면석기 + 고토기 의 존재를 한국 신석기의 시원이라고 보는 것이며, 방사성 탄소연대(AMS)로는 대략 10,000년 전으로 측정되어 초창기 신석기 문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조흔문 (條痕文)토기 또는 유기물의 흔적이 남아있는 토기 및 공반 유물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연구가 필요하다.

      한반도에서 발달된 신석기문화는 서북지역 · 동북지역 · 동해안 지역 · 서해 중부지역 · 남부 내륙지역 · 남해안 지역 등 지역에 따른 문화 발달상의 차이가 있으나 고산리식 토기문화를 초창기로 하여 조기 · 전기 · 중기 · 후기의 4단계 발전과정을 거쳤다고 본다.

     

     • 신석기시대 조기문화

      기원전 6000년 무렵부터 시작되며, 유적은 주로 남해안과 동해안 지역에서 확인된다. 남해안 지역의 유적은 대부분 패총(貝塚)으로 나타나는데 부산 동삼동 · 범방 · 북정, 여수 돌산 송도 패총, 울산 신암리, 통영 욕지도 · 연대도 · 상노대도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동해안 지역에서는 양양 오산리, 고성 문암리 유적 등이 널리 알려졌다.

     북한에서는 종래 동북지역의 나선 서포항 유적과 서북지역의 의주 미송리 유적을 기원전 6000년기에 해당하는 신석기문화 시기로 보아왔으나, 최근에는 서포항유적 1기 문화층을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보이스 만문화와 대비하여 신석기시대 전기말 또는 중기로 보는 관점이 우세하므로 앞으로의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미송리 동굴유적에서는 '之'자문 토기 2점과 새김무늬 화살촉 반제품, 뼈 송곳 3점 등이 확인되었다.

      남해안 지역의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융기문토기에 포함되는 토기들과 찌르개 · 화살촉 등 사냥용 석기, 찍개 · 긁개 · 밀개 등 조리 및 일반용구도 갖추어져 나오며 작살 · 그물추 · 묶음(결합식)낚시바늘 등 어로구도 나온다. 다만 이른 시기에는 아직 어로구는 많지 않다. 일반 뼈 연모로서 섬세한 뼈바늘 · 뼈 송곳 · 삿 바늘 · 긁개 · 찌르개 등도 많이 만들어졌다.

     동해안의 오산리유적에서는 원형의 주거지가 10 여기가 확인되었다. 토기들은 입술 가까이부터 3~4줄 정도 시문한 것이 가장 많은데, 이것들을 오산리식토기라고 한다. 납작 밑에 무늬 없는 토기들도 많다. 돌칼 · 화살촉 · 석창 · 묶음 낚싯바늘 · 돌톱 · 추모양 석기 · 그물추 · 숫돌 · 갈돌 · 찍개 · 긁개 등의 석기들이 출토되었으며 묶음낚싯바늘의 허리부분이 많이 출토되었다. 추형 석기(3.3~7cm 정도, 긴 것은 10cm 이상)는 줄을 매는 홈이 있고 전면이 갈려 있다. 최근에는 오산리 C지구 발굴 결과 오산리식토기 하층에서 압날점열구획문의 적색마연토기와 무문양토기 등이 출토되어 시기를 더 올려보는 논의도 시작되었다.

     이로 볼 때 초기 신석기 문화 요소들은 대개 덧무늬 · 민무늬 · 찍은 무늬 · 납작밑토기, 다양한 뗀석기, 일부(주로 날부분)만 마연한 석기, 다양한 뼈 도구 등으로 종합된다. 초기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사냥, 채집, 어로구를 주로 하면서 살아간 것으로 보인다. 사냥의 주 대상은 사슴과 멧돼지이며 고래 · 바다사자 · 돌고래 등의 큰 바다짐승도 잡았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아직 물고기와 조가비가 다양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창녕 비봉리 유적에서는 배의 존재도 확인되었는데, 바다 살림과 더불어 교역활동의 증거가 되는 중요 유물이다.

     

    • 신석기시대 전기문화

     기원전 4500년 무렵부터 3500년 무렵까지 지속되는 문화로서 압인 · 압날 · 자돌 등의 찍은 무늬와 자돌문 토기들이 유행하는 시기이다. 토기는 입술 및 그 가까운 부분에 짧은 횡주어골문이나 빗살무늬를 찍거나 누른 종류가 대표되며 이러한 시문 방식이 사용되는 시기를 '영선동식토기단계'라고도 한다. 대체로 무늬들이 매우 작고 미세하며 그릇의 두께도 얇은 경유가 많다. 토기는 목이 생기거나 손잡이가 붙은 경우가 많다. 이 무렵은 기후가 무척 따뜻했다고 추정되며 이러한 환경변화에 따라 전기의 살림살이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뗀석기의 비중은 줄어드나 석기의 종류는 다양해져 타제의 돌도끼 · 자귀 · 화살촉 등이 나타나며 뼈로 만든 어로구(낚시 · 작살 등), 생활용구 등이 나온다. 이 시기에는 물고기와 조개 종류 등 자연유물의 출토가 매우 늘어나는데, 이는 어로구의 증가와 일치하는 현상이다.

     남해안지방에서는 전기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한 곳에서 지속적으로 살았던 흔적이 나타난다. 이 무렵에는 여러 곳으로 주거지가 찾아짐은 물론  연대도 유적에서는 처음으로 집단 무덤이 나와 중요성을 갖는다. 무덤은 대개 구덩이를 파고 큼직한 냇돌 등을 깐 뒤, 주검을 놓고 그 위를 작은 돌, 고운 흙과 토기 조각 등의 유물로 덮은 형식이다. 펴묻기나 엎드려 묻기가 있다. 합장의 풍습도 보여준다. 무덤은 당시의 사회 구조나 장례 풍습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고, 형질인류학적 연구자료로도 기여할 바가 크다.

      동해안에서 오산리식토기는 몸체가 줄어들며 바닥이 상대적으로 넓어져 안정감을 주게 되었으며, 목단지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석기들은 묶음 낚싯바늘 · 돌칼 · 추모양 석기들이 나와 이전과 거의 같다.

     전기 후반 무렵부터는 서해 중부지방의 유적들이 많아진다. 이 무렵에는 전형의 뾰족밑 빗살무늬토기가 만들어져 유명한데 평안남도 온천 궁산리와 황해도 봉산 지탑리, 한강유역의 서울 암사동, 하남 미사리 유적 등의 주거지가 잘 알려져 있다. 이곳의 주거지들은 평면이 원형 내지는 말각방형이다. 중부 내륙지방에서 보자면 동굴이나 바위 그늘이 주거지 대용으로 여전히 사용되기도 하였다.

      궁산, 지탑리, 암사동, 단양 상시 유적에서는 석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간화살촉이 많이 나오며 버들잎 모양의 긴 화살촉 같은 찔개살도 많이 출토된다. 서해안지방에서는 물고기잡이 도구로 특히 이러한 찔개살을 많이 사용하였던 것 같고 이와 함께 납작한 자갈돌의 양면이나 네 면을 쪼아 만드는 그물추도 많이 나왔다. 돌도끼는 날 부분만 간 네모도끼 위주이나 단면이 렌즈 모양의 편평도끼도 보인다. 그리고 대팻날 · 끌· 자귀 · 창끝. 마치 · 크고 작은 숫돌과 찰절구 · 닦음돌 · 발화석 등 종류가 다양하며 주거지 안에서 석재를 같은 크기로 잘라놓은 반제품도 보인다. 갈돌 · 갈판 세트도 많이 나오는데 이들은 지탑리 유적 2 지구의 보습과 낫, 금탄리유적 의 괭이 · 보습, 암사동 유적의 괭이 · 돌낫 · 보습 등과 함께 농사짓기로 인한 곡물가공의 의존도가 높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탑리와 봉산 마산리 유적에서는 탄화된 좁쌀이 나오기도 하였다. 뼈 연모는 궁산 유적과 상시 유적에서 나왔다.

    뼈연모는 궁산유적과 상시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궁산에서는 뼈 송곳(찌르개)과 예새가 가장 많이 나왔는데 짐승의 해체나 조리에도 많이 쓰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슴뿔로 된 뿔괭이와 뒤지개 등 농사도구가 나온 것이다. 또 산돼지의 송곳니로 만든 낫 6점과 함께 칼 · 삿 바늘 · 베실이 꿰여 있는 뼈바늘과 짐승뼈 반제품도 출토되어 아기자기한 신석기시대 살림을 잘 보여준다. 상시 유적에는 찌르개 · 송곳 · 창끝 · 긁개 · 밀개 · 째개 등의 뼈 연모가 있고 자라의 배 밑판을 이용하여 구멍을 뚫고 만든 치레 걸이, 투박조개 팔찌 등이 나왔다. 투박조개는 원래 남동해안이 산지인데 내륙지방에서 전복 등의 바다조개와 함께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남동해안지방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신석기 전기 후반에는 남해안지방이나 서해 중부지방 모두에서 유물들이 양적 · 질적으로 확대되며 무덤도 나타나 붙박이 살림이 궤도에 올랐다고 하겠다.

     

    • 신석기시대 중기 문화

      기원전 4000년대 후반부터 출현하는데 남해안지방에서는 굵은 빗살무늬라고 할 수 있는 태선침선문(太線深線文 : 수가리 I식토기)을 시문한 토기들이 주로 나오는 시기이다. 토기는 대형화되며 다양한 생김새의 그릇들이 출현한다. 한반도의 전 지역에서 이 시기의 흔적이 있어 신석기 중기 문화의 확산을 알 수 있다. 반면 신석기시대 중기의 흔적이 곳에 따라 나타나지 않은 경우도 있다. 통영 상도대도 상리 유적의 경우 신석기 초기 - 전기 - 후(말)기의 존재는 확실하나 중기는 빠져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당시에 최고조에 달한 해수면 상승으로 사람들이 활동장소를 옮겨갔거나 농사짓기를 비롯한 내륙 자원을 중시하게 됨에 따라  패총 형성이 급감한 데서 비롯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삼동 패총에서 보자면 어로가 늘어나면서 동시에 짐승 사냥의 증거도 늘어나 살림의 증가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석기와 뼈 도구의 출토 양상에서 확인된다. 즉 타제 석부와 장대형 도끼의 등장, 갈돌 · 갈판의 증가 등 석기의 대형화, 다양화와 함께 뼈 도구가 다양화되고 작살 등 각종 찌르개가 정형화되는 현상과도 관련된다. 더구나 좁쌀의 재배가 전국적으로 나타나 농사짓기의 확대 현상을 볼 수 있다. 동삼동 패총의 투박조개 팔찌는 일본 규슈산 흑요석의 존재와 함께 외부지역과의 교류 사실과 특정 제품을 전업적으로 생산하는 생업 구조, 또 교역을 전담한 집단이 있었으리라는 추정 등 연구 거리를 많이 제공하고 있다.

    동해안의 오산리 유적에서는 서해안 지역 계통의 뾰족 밑 빗살무늬토기가 나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중부 내륙지방의 단양 도담 금굴, 단양 상시 3 바위 그늘, 영월 연당 쌍굴 유적 등에서 빗살무늬토기, 석기 등이 확인되고 있어 당시까지도 동굴이 사람들의 활동지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신석기시대 중기 문화가 가장 압도적인 곳은 서해 중부 지역으로서 유명한 궁산, 지탑리, 암사동 유적 등 이외에도 2000년대 들어 용인 농서리, 시흥 능곡동, 안산 신길동, 인천 영종도 중산동 · 운서동 유적 등에서 신석기시대의 대규모 취락이 잇달아 발굴되고 있으며 때로는 50여 기 이상의 주거지들이 밀집됨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신석기시대 중기 생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조와 기장을 중심으로 한 농사짓기 활동이다. 현재까지 약 10개 유적에서 탄화곡물이 나타났으며 대략 기원전 3500년 무렵부터 농사짓기가 전국으로 확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 신석기시대 후기 문화

     남해안지방에서는 매우 특징 있게 생긴 겹입술(이중구연) 토기가 만들어진다. 입술 부분을 한 겹 덧대어 이중으로 만든 것인데, 모래질이 매우 많이 포함된 흙으로 만들어 단단하고 사각거리며 크고 무겁고 검은빛을 띤다. 겹입술 토기는 남부지방에서 조사된 거의 모든 유적에서 확인되어 사람들이 널리 퍼져 살았던 시기임을 잘 보여준다. 겹입술 토기만의 층으로 이루어진 단순 유적들도 있는데 사천 구평리, 부산 금곡동 율리, 김해 농소리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금곡동 율리 유적 바위 그늘의 경우 사람들이 살기도 하였고 또 무덤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부산 수가리 패총의 경우 태선문시기는 짧으며 겹입술 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수가리 패총에서 보면 두터운 겹입술 아래에 띄엄띄엄 빗금무늬를 베풀었지만 점차 후기로 가면서 겹입술의 모양이 흐트러지며, 구평리와 금곡동 율리 유적에서 보듯이 다시 홑 입술에 가깝게 회귀하며 입술은 바라지고 무늬가 거의 베풀어 지지 않게 된다. 즉 무문토기로 가고 있는 것이다. 후기의 하한은 수가리 3 문화층 · 금곡동 율리 · 상노대도 2층 토기에서 측정된 방사성 탄소연대로 보아 기원전 1500년 무렵에 해당한다. 이 무렵에 오면 남해안지방에서도 보습 · 괭이 · 다양한 간석기 · 갈돌과 갈판 · 주먹 괭이 등 농사짓기와 관련되는 도구들이 자주 나타나서 살림살이가 전환되어 갔음을 유추하게 한다. 손잡이 아래가 옆으로 퍼져 어깨가 붙은 것처럼 보이며 대표적인 농사도구로 보이는 곰배괭이도 출토하였다. 또 새로운 유물로는 대패 날이 확인되었다. 이 무렵에 해당하는 함경북도 청진 농포동유적이나 무산 범의 구석(虎谷洞) 유적에서는 칼 · 찌르개 · 긁개 · 화살촉· 여러 점의 돌날 등 흑요석 석기가 많이 나왔다. 후기의 뼈 연모로는 활촉· 창끝 · 멧돼지 이빨로 만든 칼 · 작살 · 낚시 · 찔개살 · 예새 · 송곳·바늘 · 고래뼈로 만든 노(魯) · 뼈 숟가락 등이 확인되었다.  이때부터 굽은 낚싯바늘도 많이 나오고 있다. 가장 늦은 시기가 되면 뼈바늘이 들어 있는 뼈바늘 통 · 뿔괭이 · 조개껍질을 이용한 반달돌칼도 만들어졌다. 서해안지방에서 신석기시대 후기의 토기는 오이도 · 시도 등 서해 도서지방 거의 전역에서 발견되어 사람들이 널리 퍼져 살았음을 보여준다. 토기는 시문(施) 면적이 크게 줄어들어 주로 입술 부분에만 무늬가 새겨지며, 이것도 매우 퇴화된 양식으로 되어 무늬가 거칠고 엉성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또 1~2줄의 빗금무늬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결국은 어골 무늬가 해체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다른 지역의 후기 토기와 마찬가지로 무문화(無文化) 경향을 띄게 되는 것이다. 대동강 유역의 대규모 주거지인 평양 남경 유적에서는 공공건물인 31호 주거지에서 탄화된 좁쌀과 함께 3000여 개의 그물추, 갈판 12개 등이 나와 신석기 말의 거창한 살림을 보여준다. 그릇의 무문화 경향으로 보아 다음 시기인 민무늬토기로의 점신적인 변이를 보여주는 시기이다.

    신석기시대 후기의 토기들은 무문화 경향을 띄어가거나 남해안지방의 경우처럼 겹입술을 갖기도 하는데 후자에 대해 이른 무문토기의 하나인 겹입술의 팽이형 토기(角形土器)와 관계있을 것으로 추정하거나 신석기 · 청동기의 전환기 또는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 토기로 보는 관점 등도 새로이 등장하고 있다.

     생업을 중심으로 한 신석기시대의 활동 이외에 신석기시대의 교역이나 관념 형태 및 신앙, 제의 등의 활동도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창녕 비봉리유적에서 나온 배는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 전국에서 확인되는 결상이식 · 흑요석기 등의 존재는 중국 동북지방, 러시아 연해주 및 아무르지역, 일본 등지와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교역활동 정도와 범위가 매우 컸음을 보여준다. 남해안지방에서는 동삼동과 여수 안도를 비롯한 여러 패총유적에서 출토한 투박조개와 조몬토기 등이 교역의 증거로 더해지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관념 형태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예술품 및 치레 걸이가 있다. 신석기시대 후기로 가면서 출토 예가 늘어나는데 서포항과 농포동 유적에서 출토된 것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울산 신암리의 흙으로 빚은 여성 조각과 부산 금곡 율리의 흙으로 빚은 자안패 모양의 조각이 있다. 1980년대 이후 양양 오산리 유적에서는 흙으로 빚은 사람 조각품이 나오며, 동상동에서는 사슴 모양 그림 토기들도 나왔다. 완도 여서도 패총에서  출토한 골각기들은 다양하며 그 예술성도 서포항, 농포동 유적 못지않게 뛰어나다. 이러한 것들은 대체로 주거지보다 무덤이나 패총 등에서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무덤 유적이 확인된 곳은 신석기시대 조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연대도를 포함하여 약 20여 곳에 이른다. 특히 여수 안도, 울진 처용리 부산 가덕도 장항유적 들에서 집단 무덤이 발굴되고 있는데, 펴 묻기 · 엎어 묻기 ·굽혀 묻기 등 장법도 다양하며 투박조개를 장착한 채로 나온 시신의 예도 있다. 옥제 치레 걸이, 일본과의 교류를 증거 하는 조몬 토기 등도 출토된다. 무덤 유적은 특히 당시의 장례를 중심으로 하는 의례 관계와 생사관, 사회 구성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 신석기 문화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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