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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노대도유적(統營 上老大島遺蹟)
    역사 및 고고학 2022. 2. 13. 20:25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면 노대리에 위치한다. 1978년 연세대학교 ·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상리유적과 1988년 부산수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산등패총이 있다. 상리유적은 맞은편의 하노대도를 바라보는 남쪽의 바닷가에 비스듬히 펼쳐져있으며 바닷가에서 5~10m 정도 떨어져 있다. 2섬이 마주보고 있어 그 사이의 바다는 호수 같은 느낌을 준다. 유적의 해발은 5~10m 사이이다. 상노대도 크기는 동서 2.25km, 남북 1.25km로서 넓이는 2238 정도이다. 산등패총은 상리에서 서북쪽으로 깃대봉의 연봉을 넘어 섬의 끝쪽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상리유적의 층위를 연세대학교가 발굴한 구덩이에서 살펴보면 전체 층위는 10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패층은 2·4·6·7·8층이다. 가장 아래층인 10층은 중석기층으로 추정된 바 있고 9~2층이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신석기 이른 시기(초기)에 해당하는 9 · 8 · 7 · 6층에서 보면 9층에서는 덧무늬토기와 무늬없는 토기들이 주체를 이루나 점차 위층으로 갈수록 찍은 무늬들이 많아지고 있다. 또한 9층에서는 납작밑토기가 대부분이나 위로가면서 점차 둥근밑이 나오게 된다. 특이한 토기로는 북한의 의주 미송리 동굴유적에서 나오는 '之'자무늬 토기편이 나왔다는 점이다. '之'자무늬토기는 중국 동북지방의 요령성을 중심으로 신석기 이른 시기에 출현하는 토기인데 상리유적에서는 매우 선명하고 분명한 '之'문이 나와 주목을 끈다. 상노대도 이외에도 남해안지방에 서는 간혹 ‘之자무늬토기의 모티브로 볼 수 있는 토기무니들이 나오고 있다.

     9층에서 간석기와 숫돌도 출토되지만 밀개, 긁개, 찌르개, 톱니날 긁개, 콧등날 밀개 등 후기 구석기의 전통이 남아있는 석기들이 출토된다. 이것이 상노대도유적 출토 석기에서 특히 주목할 점이다. 뼈연모를 보면 긁개가 가장 많고 송곳, 긁개, 찌르개, 밀개와 덜된 연모도 많았다. 동물뼈로는 9층에서 색가오리, 참돔, 양놀래기 등이 나오며 조개류는 거의 없으나 8 · 7 · 6 층에서 보면 사슴과 고래과, 멧돼지, 물개, 바다사자 등의 뼈가 나타난다. 그리고 난류성인 도미과의 여러 종이 많이 잡힌 것으로 나타나며 조개는 홍합, 소라 등이 굴보다 우세하여 부산 동삼동패총과 비슷한 반면 서해안의 패총과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5층은 신석기 전기(부산기 또는 영선동 이에 기)에 해당된다. 토기는 촘촘히 찍은 무늬가 주체를 이루며 무늬가 화려하고 다양하다. 소량의 덧무늬도 나온다. 뗀석기의 비율은 줄어드나 뗀돌도끼, 돌자귀 등 나무를 다루는 큰 공구가 많아지며 뗀화살촉을 비롯해서 석기류가 다양해진다. 뼈연모로는 낚싯바늘, 묶음낚싯바늘이 가장 많으며 뼈송곳, 삿바늘 등과 함께 작살류가 많으며 긁개 등 일반 뼈연모의 수도 이전보다 훨씬 많다. 대체로 5층 토기의 무늬가 다양하듯이 뼈연모나 치레걸이의 생김새도 다양하다.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낚시도구의 증가인데 이들은 여러 종의 도미뼈가 출토되는 것과 관계 깊은 것으로 보인다.

     조개류는 전복, 홍합, 소라, 눈알고둥, 굴, 개조개 등 21종으로 늘어났다. 짐승상을 보면 멧돼지, 사슴 이외에 고래과, 수달, 물개, 바다사자(강치) 등의 바다짐승이 늘어나는데 이러한 현상은 동삼동패총의 부산기에 바다자원에 대한 비중이 증가하는 현상과 궤를 같이한다. 산우렁이, 제주나사산우렁이, 번데기우렁이 등  물달팽이 3종도 보고되었다.

     상리유적에서는 남해안 신석기 중기의 전형적인 새김무늬(태선침선문)토기 시기(동삼동의 두도기 또는 수가 I식토기)가 빠져있다. 이 유적의 층위를 보면 4~3층 사이에 개펄층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이 흙은 퇴적물 분석결과 바닷물에 의한 퇴적으로 나타났다. 결국 개펄층은 당시의 해수면 상승과 관련 있으며, 그 해발고도로 미루어 당시의 바닷물은 지금보다 5m 정도 높았던 것으로 추정하는 한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상리유적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남해안 신석기유적에서 두도기가 종종 보이지 않음은 이러한 해수면 상승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석기 후기에 속하는 4 · 3 · 2층에서는 겹입술(이중구연)토기가 출현하고 있다. 이 토기는 남해안지방의 거의 모든 신석기유적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신석기시대 마지막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 퍼져 살았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토기는 순모래질로 크고 무거우며, 그을리는 방법으로 구워 환원계통의 색(검은색 - 회색계 열)을 띤다. 석기로는 돌도끼, 대패날 등 간석기의 비중이 크며 이들을 만드는 숫돌과, 그 밖에 공이, 공이판, 갈돌· 갈판, 주먹(곰배)괭이 등이 나타난다. 조합식작살의 일부로서 일본의 후카보리(深屍貴蘭), 아카마스 유적 등에서 출토하는 것과 같은 흑요석기도 나온다. 이는 4층에서 나오느 조몬토기와 함께 당시 일본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뼈연모도 다양하고 많으며 바늘, 눈금자 등을 보면 제작 솜씨가 뛰어나다. 

     후기의 바다짐승으로는 고래, 물개, 강치, 바다거북의 뼈가 나오며, 사슴과와 멧돼지 이외에 여우나 개, 집쥐 등 뭍짐승의 뼈가 늘어난다. 바다거북, 수염고래처럼 아열대 동물의 뼈가 나오는 것은 온천 궁산유적의 물소뼈나 동삼동패총의 말전복과 함께 한국 신석기시대에 기후극상기가 있었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자료이다. 조개 따기는 더욱 늘어나 2층에서 30여종의 조개류가 나오는데, 이는 상리유적 전 층위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이다.

     사람의 어금니 한 점이 나와 이를 전자현미경으로 조사하고 닳음새 등을 분석한 결과 45세 가량의 남자이며, 육식과 채식을 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산등패총은 패총과 무덤이 확인된 곳이다. 6개의 퇴적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4층이 순조가비층이다. 최하 층인 6, 5층에서 찍은 무늬와 함께 덧무늬토기가 약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상리 5층, 부산기 등에 해당할 것으로 보인다. 최상층인 1층과 그 아래 2층에서 퇴화된 겹입술토기가 나온다. 석기로는 긁개, 밀개 등의 뗀석기와 도끼, 글, 공이 및 많은 격지들이 나왔다. 짐승뼈, 물고기, 조개와 고동류는 대부분 상리유적에서 출토되는 종류와 같다.

     산등패총에서는 왼팔에 팔찌 3개를 끼고 바로 펴묻기를 한 사람뼈가 나왔는데 13~15세의 여자로 분석되었다. 산등패총의 집석유구는 조개를 구워먹던 곳으로 추정되었다.

     상노대도유적의 토기발달 순서는 동삼동패총의 토기 변천과정과 유사하다. 9 · 8 · 7 · 6층의 덧무늬 및 무문토기는 동삼동패총의 조도 - 목도기에 해당하며 5층의 찍은 무늬토기는 부산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상리유적과 산등패총에서 다 나타난다. 여수 돌산 송도패총, 통영 욕지도 · 연대도 유적 등 남해안의 패총에서도 비슷한 발달순서를 거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상라유적 5층의 방사성탄소 연대값은 6430년 전(미보정)으로서 동삼동 패총 부산기에서 측정된 연대보다 약간 이르게 나타난다. 그 다음 시기인 산등패총 4층의 방사성탄소 연대값은 4660±110, 4360±110년 전(미보정)으로 측정되었다. 상리유적 2층에서 출토된 조가비로 측정한 연대값은 3430±60년 전(미보정)으로 동삼동패총 영도기, 수가리 패총 3문화층의 탄소연대와 잘 맞는다.

     상노대도유적 발굴의 성과 가운데 중요한 점을 들어보 면 첫째, 한국신석기연구에서 토기무늬의 발달순서에만 치중하던 연구를 유적의 환경과 석기, 뼈도구, 동물상 등 당시의 모든 자연 및 문화유물에 대한 관심을 갖는 쪽으로 돌렸다는 점이다. 특히 해수면 변동 등에 대한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다. 둘째, 상노대도유적에서 출토된 석기는 양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잘 분류되어 지금까지 빈약한 신석기시대의 석기연구에 도움이 된다. 특히 초기 문화층에서 나오는 석기에 후기 구석기시대의 석기제작 수법이 남아있다는 견해는 한국 선사문화의 연속성 여부 를 결정하는데 중요 단서가 될 것이다. 셋째 신석기 후기에 늘어나는 조몬 관계자료 및 흑요석기들도 일본과의 교류, 원산지 추정 등에 의미가 크다. 넷째 유물로 본 상노대도유적의 살림살이는 이웃 동삼동패총 및 주변 도서지역과 매우 유사하여 신석기시대 남해안의 해안 ~ 도서문화를 밝히는데 중심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들어 겹입술토기의 시기는 신석기시대가 아니라 전환기 또는 청동기시대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으나 이는 토기에 대한 규정이며 그 밖의 문화요소는 이전과 동일하거나 확장되는 모습이라는데서 장차 당시의 사회 경제문화 연구가 심도 있게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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