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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인돌(支石墓, Dolmen)
    역사 및 고고학 2022. 2. 22. 08:16

     고인돌은 거대한 돌을 이용해 만든 선사시대 거석건조물의 일종이다. 이런 고인돌은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고 있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墓標石)으로, 또는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기념물)으로 사용되는 것도 있다. 한국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고인돌은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른데, 한국에서는 '고인돌' 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 중국에서는 석붕(石棚)과 '대석개묘(大石蓋墓)라 하고, 유럽에서는 지역에 따라 독자적인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거석기념물 또는 '돌멘(Dolmen)' 이라고 부른다. 이는 세계적으로 선돌(立石, Menhir)과 함께 거석건조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고인돌을 일반인들은 자연석이 땅에 묻 혀있는 것에서 독배기 · 바우배기 등 독바우로, 받침돌이 고이고 있는 기반형의 경우 핀바우 · 암닭바우로, 덮개돌의 형상을 따라 거북바우 · 두꺼비바우 · 개구리바우로, 민간신앙과 고인돌의 배치상에서 칠성바우, 옛날 장군이 돌을 옮기다가 말았다는 전설이 많아 장군바우 등으로도 불린다.

     고인돌 분포(支石墓 分布)는 북유럽, 서유럽, 지중해 연안지역, 인도, 동남아시아, 일본 구주지방, 중국 동해안지역과 동북지방, 그리고 한국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인접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드물게 발견되고 있다. 이처럼 고인돌은 유럽, 북아메리카, 지중해연안, 아시아 등 거의 세계적인 분포 를 보이고 있으나 각 지역마다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아시아지역에서는 한국에 약 30,000여 기로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전남지방에 집중적으로 20,000여 기가 밀집 분포되어 있다.

     고인돌 형태(支石墓 形態)는 각 지역에 따라 그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이는 각 지역마다 전통과 독자적인 문화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고인돌은 외형적 형태에서 크게 탁자식(北方式), 기반식(南方 式), 개석식(無支石式) 등 3종류 가 있다. 탁자식고인돌은 잘 다듬어진 판돌 3매 또는 4매로 짜맞춘 돌널(石棺)을 지상에 축조하고 그 위에 편평하고 거대한 판돌상의 돌을 얹어놓아 마치 책상모양이며, 주로 북쪽에서 많이 나타나 '북방식' 이라고도 한다. 대형의 탁자식은 요동반도와 한국 대동강유역에서만 나타나고 구릉이나 산중턱에 1기씩만 있다. 이외 지역의 탁자식은 규모가 작고 돌널 폭도 좁고 덮개돌(上石)이 두터운 것들이다. 기반식고인돌은 판석(板石)을 세우거나 깬돌(割石)로 쌓은 무덤방(墓室)을 지하에 만들고 그 주위에 고임돌(支石) 4개에서 8개 정도를 놓고 그 위에 커다란 바위같은 돌로 덮어 마치 바둑판모양이 며, 주로 남쪽에 집중되어 있어 '남방식' 이라고도 부르다. 덮개돌이 거대하고 괴석상(塊石狀)을 한 것은 호남과 영남지방에서만 보이고 무덤방이 없는 것이 많다. 개석식고인돌은 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바로 뚜껑으로 덮개돌이 놓인 형식으로 요동반도, 한반도, 일본 구주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이는 고임돌이 없는 기반식으로 분류하여 '무지석식' 이라고도 한다.

     고인돌의 무덤방은 판돌로 된 돌널형(石棺型), 깬돌이나 냇돌(川石)로 쌓은 돌덧널형(石槨型), 구덩이만 있는 토광형 (土境型), 덮개돌 아래에 돌만 돌려진 돌돌림형(園石型) 등이 있고, 그 평면 형태는 긴네모꼴(長方形)이 대부분이다. 한반도의 고인돌 기원(支石墓起源) 문제는 한국에서 자생하였다는 자생설, 동남아시아에서 해로를 통해 전파되었 다는 남방설, 북방의 돌널무덤에서 파생되었다는 북방설 등이 있다. 자생설은 한반도에 고인돌이 가장 밀집 분포되어 있고 형식도 다양한 반면 인근지역에는 드물게 분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연대도 늦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고인돌이 독자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세계적인 밀집분포권을 형성한 것은 오랜 기간동안 정착 성행되었기 때문에 독특한 고인돌문화를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남방설은 동남아시아로부터 해로를 통해 도작문화(稻作文化)와 함께 중국 동북해안지방과 한반도에 전파되었다는 설이다. 이는 고인돌의 분포가 평안도, 황해도, 전라도 등 서해안을 따라 집중 분포되어 있고, 남방문화의 요소인 난생설화의 분포지역과 고인돌 분포지역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과 세골장(洗骨葬) 풍습이나 벼농사를 배경으로 한 정착농경문화와 함께 동남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전파 되었다는 것이다. 북방설은 크게 보면 자생설에 포함시킬 수 있는데 이는 한반도 청동기문화가 요령지방의 청동기문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기본 관념에서 요령지방의 돌널무덤에서 변화 발전하였다는 설이다. 한국 청동기문화가 북방계통의 요령지방 청동기문화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견해로 보이나 양 지역 간 독특한 형태 즉 탁자식과 기반식이라는 형식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고인돌 출토유물(支石墓 出土遺物)은 크게 무덤방 안의 부장용(副葬用) 유물과 무덤방 주변의 의례용(儀禮用) 유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부장용 유물은 돌검(石劍), 돌화살촉(石錄), 붉은간토기(江陶), 가지무늬토기(彩文土器), 청동기, 옥류 등이 있으며, 의례용 유물로는 돌화살촉, 돌칼(石劍), 홈자귀(有精手斧), 돌끌(石鑿), 숫돌, 갈돌(石棒), 가락바퀴(統鍾車), 그물추(漁網華) 등 다양한 석기류와 토기 파편들이 있다.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부장용 유물들은 거의 대부분 돌검 1점씩 부장시키고 있으나 돌검 1점과 돌화살촉 수 점 또는 수십 점씩이 한 무덤방안에서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고인돌에서의 표지적(標識的)인 유물은 돌검과 돌화살촉이다. 돌화살촉만 무덤방안에 부장된 경우는 없고 출토되더라도 벽에 꽂혀져 발견된다. 그리고 남해안지역의 고인돌에서는 비파형동검등 청동기와 옥류, 붉은간토기나 채문토기를 부장하는 풍습이 매우 성행하였다. 이러한 면들은 시기적인 차이도 있으나 집단이나 신분적인 면에서 각기 다른 유물이 출토된 것이 아닌가 한다.

     세계의 거석문화는 신석기시대부터 축조되었다고 하나 지역에 따라 그 형태나 시기가 각각 달리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의 상한연대를 신석기시대 축조설과 청동기시대 축조설로 보고 있다. 신석기시대 축조설은 거석문화가 신석기시대부터 축조하였으며, 씨족의 공동무덤의 성격을 띠고 있는 점과 고인돌 주변에서 뗀석기(打製石器), 빗살무늬토기편등이 출토된 점을 들고 있다. 청동기시대 축조설은 B.C. 2000년대 말과 1000년대 초와 중기설이 있다. B.C. 2000년대 설은 중국 요령지방의 고인돌 연대와 비교하는 설이며, B.C, 1000년대초 설은 방사성탄소연대를 참고하여 한국 청동기문화의 형성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측면이다. B.C. 1000년대 중기설은 1960년대 초까지 탁자식고인돌의 연대로 제시된 설이다. 한반도 고인돌의 상한은 B.C. 8세기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 북한에서는 종전의 B.C. 12세기 설에서 단군릉 발견 이후 고인돌을 단군조선과 관련시키기 위해 B.C 24세기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하한 연대는 청동기시대 전기 말기설, 후기설, 기원후설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 전기 말기설은 B.C. 4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세형동검(細形銅劍) 문화보다 앞선 시기인 비파형동검문화로 보는 것이고, 후기설은 B.C. 3~2세기 또는 서력 기원전후로 보는 설로 세형동검 문화시기까지 고인돌이 축조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세형동검 초기와 관련된 유물이 일부 출토되지만 소위 '김해식토기(原三國土器)는 주위에서 발견된 것들로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기원후설은 1세기와 4세기가 있으나 1960년대 초까지 '금석병용기시대' 또는 가야계 구덩식돌덧널무덤(土境石槨墓)과 연결시킨데서 나온 것이다. 한반도 고인돌의 하한은 B,C, 3~2세기설이 대체로 수용되고 있는 편이다.

     고인돌에서 발견된 인골로 보아 하나의 무덤칸에 한사람만 묻은 것이 보통이나 탁자식의 경우 한쪽면의 개폐가 용이하여 복장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황해도 오덕리 고인돌처럼 무덤칸 내부에 몇 개의 칸막이된 공간에 인골이 흩어져 있는 특수한 예도 있다. 고인돌의 매장방법은 신전장(伸展葬), 측와굴장(側臥屈葬), 화장(火葬), 측장(側葬), 세골장(洗骨葬, 二次葬) 등이 있다. 신전장은 황석리의 예처럼 고인돌의 보편적인 장법이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확인된 인골로 본 성별 장법은 남자는 신전장을, 여자는 측와굴장을 하고 있으며, 나이는 20세에서 30세 초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상의 장법 중 신전장이 고인돌에서 가장 많이 사용 되고 있으며 또 무덤칸도 훨씬 정교하게 축조하였다.

     고인돌 축조(支石墓 築造)시 가장 어렵고 중요한 작업이 덮개돌(上石)의 채석과 운반이다. 덮개돌은 주변산에 있는 바위를 그대로 옮겨온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암벽에서 떼어내서 다듬은 바위를 이용하고 있다. 암벽에서 덮개돌을 떼어내는 데는 바위틈이나 암석의 결을 이용하여 인공적인 구멍에 나무쐐기를 박아서 물로 불리어 떼어내는 방법을 일반적으로 이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얻어진 덮개돌은 동원된 사람들에 의해 고인돌을 축조하려고 하는 장소로 옮겨지게 된다. 덮개돌을 옮기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동원이 필요한가는 실험고고학에 의해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다. 1ton의 돌을 1마일(1.6km) 옮기는 데 16~20명이 필요하며, 32ton의 큰돌을 둥근 통나무와 밧줄로 옮기는 데 200명이 필요하다는 연구가 있다. 떼어낸 덮개돌을 운 반하는 방법은 여러 개의 둥근 통나무를 2겹으로 엇갈리게 깔고 덮개돌을 옮겨놓아 끈으로 묶어 끈다거나 지렛대를 이 용하는 방법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무게가 가볍고 가까운 거리에는 지렛대식이나 목도식이, 먼거리는 견인식(끌기식) 이 쓰여졌을 것이다. 운반되어온 덮개돌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칸 또는 고임돌에 적당히 흙을 경사지게 돋우고 그 위 로 덮개돌을 끌어올린 후 흙을 제거하였다고 추정된다. 이 는 덮개돌과 고임돌 사이에 종종 흙으로 메워져 있는 흔적 으로 증명된다. 이와 같은 고인돌의 운반과 축조는 많은 사 람이 동원되는데 적게는 50여 명에서 많게는 200~300명 정도여서 당시의 고인돌사회에서는 하나의 거족적인 행사 | 였을 것이다.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한 씨족 집단 뿐 아니라 이웃씨족이나 부족집단의 인력까지 동원해 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회적 협력체계나 강력한 지배력이 있어야 하며, 그 당시 사회에 서 노동력을 얻는 대가(對價)로 향연을 베풀 수 있을 잉여생산물의 축적이 있어야 가능하다. 고인돌 주변에 많은 토기편들이 발견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고인돌 축조에 동원된 사람들을 위해 축조 후 제사나 연회가 벌어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 · 경제적인 배경에서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북방의 유목사회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고 정착 농경사회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마을공동체를 이루는 씨족단위사회에서 다수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신적 구심점인 원시신앙을 갖고 씨족의례로서 고인돌을 축조하였다고 보여진다.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력을 동원 해야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사회는 북방의 유목사회보다는 정착 농경사회에서 협동하는 사회였다고 본다. 한반도 고인돌 사회(支石墓 社會)는 씨족사회설(氏族社會說), 부계사회설(父系社會說), 부족사회설(部族社會 說), 족장사회설(族長社會說), 공동체사회설(共同體社會說) 등의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씨족사회나 부계제사회설은 혈연을 중심으로 한 집단들의 가족공동묘로 고인돌이 축조 되었다는 설로 1960년대 이전과 북한지방에서 보는 설이 다. 부족사회설은 고인돌이 평등한 공동체 사회로 연장자나 능력있는 지도자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족장사회설은 선사시대 사회발전과정에서 전문인이 출현하여 지역간의 문화전파 및 교역을 촉진하였으며, 토착농경을 바탕으로 하여 계급이 발생한 사회였다는 견해이다. 공동체사회 설은 고인돌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러 개의 군집으로 공동체사회 설은 고인돌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러 개의 군집으로 분포되어 있고 무덤방이 열지어 배치되어 혈연 집단의 공동 무덤으로 본 견해인데, 고인돌이 수십 기씩 여러 곳에 분포된 것으로 볼 때 일정한 지역 안에서의 각 집단간의 상호 협동체계에 의해 혈연적이거나 지연적으로 뭉쳐진 공동체사회라는 것이다. 이 공동체사회는 집단간의 영토 확장을 위해 전투를 통한 통합과 흡수 과정으로 유력한 집단과 지배자가 출현하여 소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 이 사회에서 인접 집단과의 전투 과정에서 전사자의 공헌묘로 고인돌을 축조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역사상의 문헌기록과 관련시킨 것으로는 예맥족과 고조선족이 있다. 모두 청동기문화를 소유한 종족인데, 이 청동기와 고인돌을 같은 문화로 보고 있다. 예맥족은 중국 요하유역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종족으로 비파형동검 등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한 농경사회 집단으로 보고 있는 점이며, 고조선족은 그 특징적인 비파형동검이 대석개묘라는 무지석식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점으로 북한에서 보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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