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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자루칼(環頭大刀)역사 및 고고학 2022. 2. 21. 16:38
고리자루칼(環頭刀)은 둥근 고리형태의 손잡이 머리를 가진 칼이다.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출토되는 고리자루칼은 한반도의 경우 B.C. 1세기대부터 출토되며, 창원 다호리 1호분의 민고리자루손칼(素環頭刀子)이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이다. 중국의 경우 전한대(前漢代)부터 후한대(後漢 代)에 이르기까지 동검(銅劍)이 동칼(銅刀)로 바뀌게 되고 이것이 다시 쇠칼(鐵刀)로 변하게되면서 나타난다.
고리자루칼은 칼의 크기와 손잡이 머리부분의 특징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누어진다. 먼저 크기에 따라 전체 길이가 60cm 이상인 것을 큰칼(大刀), 30cm 이상 60cm 미만인 것을 작은칼(小刀), 길이가 30cm 미만인 칼을 손칼(刀子)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손잡이 머리부분에 의한 분류는 한국의 경우 민고리자루칼(素環頭刀), 세잎고리자루칼(三葉環頭刀), 세고리자루칼(三環頭刀), 용봉고리자루칼(龍鳳環頭刀), 귀신고리자루칼(鬼環頭刀)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삼국시대의 고리자루칼은 울산(蔚山) 하대유적(下生遺蹟)에서 출토된 것이 대표적인데, 민고리자루작은칼(環頭小刀)이 먼저 출토되고, 민고리자루큰칼(小環頭大刀)이 나타난다. 그 외의 민고리자루큰칼이 출토된 유적으로는 김해 양동리 고분군, 김해 대성동 고분군, 부산 노포동 고분군 등이 있다. 원삼국시대 이후 4세기대에는 민고리자루칼의 전통이 계속되는 한편, 세잎고리자루큰칼(三葉環頭大刀)이 발생하는 등 고리자루칼의 형식이 다양하게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의 특징 중의 하나가 세잎고리자루큰 칼의 출현으로 볼 수 있는데, 다음에 나타나는 장식성이 강한 세잎고리자루큰칼과는 고리의 형태나 잎의 형태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또 이 시기의 세잎고리자루큰칼은 철로 제작되는 점에서 다음 시기의 금동 · 은제로 제작되는 세잎고리자루큰칼과는 다르다.
철제 세잎고리자루칼이 출토된 유적으로 신라 · 가야지역 에서 동래(東來) 복천동고분군(福泉洞古墳群)이 있으며, 고구려지역에서는 평양(平壤) 병기창지(兵器廠址), 환인(桓仁) 고력묘자(高力墓子) 15호분 등이 있다. 일본의 경우 나라(奈良) 동대사산(東大寺山) 1호분 복도현(福島縣) 회진대 총산 고분(會津大塚山古墳), 복강시(福岡市) 약팔번궁 고분 (苦八播宮古墳) 등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이 철제세잎고리자루큰칼은 매우 제한된 소유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정치와 군사적인 힘을 나타내는 상징적 위세품(威勢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원류는 고구려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5~6세기대에 들면서 고리자루칼은 가장 전성기를 맞이 하는데, 여러 가지 형태로 제작되며 장식성이 증가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 형태는 세잎고리자루큰칼, 세고리자루큰칼(三環頭大刀), 용봉고리자루큰칼(龍鳳環頭大刀), 귀신(얼굴)고리자루큰칼(鬼環頭大刀) 등으로 다양하게 제작되며, 칼손잡이와 칼집에도 금이나 은 등의 장식이 부착되어 있다.
세잎고리자루큰칼(三葉環頭大刀)은 고리 안에 세잎형태의 도상(圖像)이 있는 것을 말하며, 이 세잎의 형태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 세잎의 기원은 인동문(忍冬文)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세잎고리자루칼은 주로 신라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고리의 형태가 둥근 것과 위는 둥글고 밑은 각을 이루는 상원하방형(上圓下方形)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전자의 출토 예로 동래 복천동 고분군 10 · 11호묘가 대표적이며, 후자로는 황남대총, 천마총, 대구 비산동 37호분, 성주 성산동 1호분, 경산 임당지역 조영 CI-1호분, 임당 6A호분, 창녕 교도 7 · 87호분, 의성 학미리 1호분 출토품 등이 유명하다. 이 외에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는 고령 지산동 45 · 1 호 돌덧널무덤(石槨墓) 출토품이 있다.
용봉고리자루큰칼(龍鳳環頭大刀)은 고리 내에 용이나 주작의 머리부분만 표현된 도상이 들어 있는 것을 말하며, 일부 연구자들은 봉황을 주작으로 부르기도 한다. 고리자루칼의 용과 봉황 형태는 용이나 봉황이 개별적으로 또는 서로 조합되어 존재하며, 단용(單龍) · 단봉(單鳳) · 쌍용(雙龍) · 쌍봉(雙鳳) · 용봉(龍鳳) 등 5가지 형태로 세분할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은 단용고리자루큰칼이며 창녕 교동 10호분과 합천 옥전 M3호분 출토 고리자루큰칼은 용봉고리사루큰칼도 문류되어 진다. 이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과 영남대박물관 소장품이 유명한데 이들은 용과 봉황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의 독특한 고리큰칼로 귀신고리자루큰칼(鬼環頭大刀)이 있는데, 이는 현재 그 출토 예가 많지 않다. 크게 귀신의 몸 전체가 도상으로 표현된 귀신고리자루큰칼과 얼굴만 표현된 귀신얼굴고리자루큰칼(鬼面文環頭大刀)로 구분된다. 귀신고리자루큰칼은 전 창녕 출토 소창(小倉)콜렉션 4호칼이 유명한데, 여기에는 이빨을 드러낸 얼굴에 큰 배와 풍부한 유방 그리고 양팔과 양다리를 좌우로 활짝 벌리고 있는 귀신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귀신 얼굴고리큰칼은 현재 일본에서만 출토되는 고리자루칼의 도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를 사치문(獅齒文)이라 하여 '사치고리자루큰칼(獅齒環頭大刀)' 이라고 부르고 있다. 대부분 일본에서 출토되며 한국의 경우에는 고리자루칼은 아니지만 경주 금관총과 합천 옥전 12호분에서 손칼의 장식구인 금제귀신얼굴장식(金製鬼面文裝飾)이 출토된 예가 있다.
고리자루칼은 위세품의 한 종류로 이해되고 있으며, 금동관과 더불어 중앙에서 지방으로 하사(下賜)한 것으로 이해 되고 있다. 이러한 하사의 의미로는 지방지배의 일환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며, 특히 신라의 경우 경주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에 경주식 위세품이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신라의 지방지배의 산물로 해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금동관과 고리자루칼이 지방에서도 자체 제작 되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어 이와는 다른 해석을 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이러한 고리자루칼의 분포에 대한 해석에 있어 일부 학계에 논란이 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고리자루칼을 비롯한 경주식 위세품의 분포는 중앙과 지방의 정치 · 문화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6세기 중엽 이후가 되면 고리자루칼을 점점 무덤에 부장하지 않게 된다. 이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의 등장과 함께 박장(薄葬)이 유행하고, 중앙과 지방과의 관계가 예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으로 설명된다. 다만 신라왕릉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등에서만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일본의 경우 6세기 후반 경에 용봉고리자루칼이 자체적으로 제작되며, 전국적으로 배포되기 시작한다. 그 이후로는 둥근고리자루칼, 규두대도(主頭大刀), 규추대도(生惟大刀) 등으로 변화하게 됨으로서 고리자루칼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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