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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사리유적(河南 漢沙里遺蹟)
    역사 및 고고학 2022. 2. 10. 08:24

    사적 제269호, 경기도 하남시 미사동 557-1 일대에 위기한다. 미사리는 본래 한강의 하중도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여 한강의 하류로 접어드는 하곡이 넓어지면서 생긴 여러 섬 중의 하나였다. 유적이 위치한 한강하류지역의 지질조사에 따르면, 이 일대 제4기 동안의 지형형성 과정은 크게 5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미사리 섬은 5단계인 기후최적기에 일어난 전반적인 해수면 상승에 따라 강물이 범람에 따른 토사의 퇴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사리유적은 1960년 김원룡의 소개를 통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몇 차례의 지표조사를 거친 후 1980년 4개 대학 연합발굴단에 의해 처음 일부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고 이 조사를 통해 신석기시대유적 뿐만 아니라 청동기~원삼국시대에 걸친 유적도 존재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이후 1987~1993년까지 3차에 걸쳐 연합 발굴단(건국대학교 · 경희대학교 · 고려대학교 · 숭실대학교 · 서울대학교 · 성균관대학교 · 한양대학교)을 구성하여 3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는 미사리의 북동쪽 강안을 따라 약 1.8km 구간에 대해 실시되었으며, 총 조사면적은 159,700에 이른다. 미사리의 퇴적층은 한강의 범람에 의해 자갈과 모래가 쌓인 토층으로 전체적으로 단순한 양상을 띠지만 강물에 의한 퇴적과 침식, 재퇴적이 빈번하게 반복되어 부분적으로 복잡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유적의 문화층은 조사지역에 따라 20개 이상의 층위로 세분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6개층(3~8층)으로 구분된다. 이중 신석기시대 문화층은 7층(황갈색사질토층)과 8층(암갈색 사질점토층)이다. 유적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 유구는 총 33기로 수혈주거지 1기, 소형수혈유구 2기, 야외노지 30기 등이다. 수혈 주거지는 고려대학교박물관이 조사한 지역에서 조사되었다. 주거지의 규모 5.4 × 4.5m로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며, 잔존깊이는 0.42m이다. 주거지 내부의 벽면을 따라 1.05m 간격으로 9개의 주혈이 나타나지만, 표면을 얇게 덮고 있을 뿐으로 보고자는 기둥을 땅에 깊이 박은 것이 아니라 받침목의 형태로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내부에서 노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유물은 소량의 빗살무늬토기편이 출토되어 장기간 이용된 주거지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저장공은 자름 2m 내외의 타원형 수혈유구로 소량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내부가 주머니 모양을 하고 있어 저장공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성격은 분명하지 않다. 야외노지는 30기로 유적에서 확인된 신석기시대 유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유구는 강돌을 깔아 만든 것으로 얕은 수혈을 파고 강돌을 깐 경우가 대부분이나, 수혈을 파지 않고 강돌만을 깐 경우도 있다. 평면형태는 대부분 원형에 가까우며, 규모는 직경이 5m가 넘는 대형부터 0.5m 내외의 소형까지 다양한데, 1m 내외가 가장 많다. 직경이 5m가 넘는 대형 야외노지는 경희대학교, 서울대학교 발굴지역에서 각 1기, 한양대학교 발굴지역에서 2기가 조사되었다. 유구의 성격에 대해서는 집단 취사시설로 보는 견해와 토기요지로 보는 견해가 있다. 소형노지의 성격은 대체로 야외취사시설로 추정되지만, 일부 보고자는 신석기시대 주거지가 청동기시대 유대 강물의 범람으로 파괴된 후 남은 주거지 내부의 노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유적에서 다수의 야외노지유구가 확인되는데 비해 주거지가 거의 조사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3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첫째는 발굴된 지역의 대부분이 현장보존되는 것으로 결정됨에 따라 대부분의 지역에서 발굴조사가 청동기시대 문화층까지만 조사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둘째는, 소형야외노지를 주거지 내부의 노지가 잔존한 것으로 보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신석기시대 문화층이 청동기시대 유구나 침식으로 유실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발굴조사의 보고자들은 대체로 이상의 2가지 이유 때문에 주거지가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신숙정은 이러한 이유만으로 신석기시대의 유구와 유물이 청동기시대에 비해 현저하게 적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미사리의 지형형성 과정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미사리지역은 한강하류 지역의 퇴적 및 지형분석 결과로 볼 때 자연제방이나 범람원 등이 성숙되지 않아 취락이 형성되기에 적당한 지형이 아니었으며, 서울 암사동유적과 같은 주변 취락에서 자원을 채취하기 위한 캠프로 이용됐을 것으로 보았다. 그 결과로 주거지는 거의 없으며, 야외노지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출토 유물은 다수의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해, 타제석부, 마제석촉, 갈돌, 갈판, 어망추 등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의 문양은 서울 암사동유적과 유사한 구분계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토기의 문양은 구분계가 주류를 이루며, 구연부에는 단사선문이 동체부에는 단치 횡주어골문, 다치횡주어골문, 단치종주어골문이 시문된 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토기문양 중 동체부 문양이 암사동 유적의 경우 다치횡주어골문이 우세한데 비해 미사리유적에서는 단치횡주어골문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이 다른 점이다. 이외에도 소수이지만 금탄리 1식토기와 서해안식토기도 출토된다. 석기는 타제석부류가 가장 많이 출토되며, 마제석촉, 석부, 어망추, 갈돌, 갈판 등이 출토 되는데, 대부분 유물포함층에서 출토되어 유물의 조합관계는 파악하기 어렵다.

     미사리유적은 암사동과 함께 한강유역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여, 중서부 신석기시대 전기 후분에서 중기 전반(기원전 4000~3500)이  중심 시기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통설이다. 하지만 기원전 3000년을 전후한 시기, 신석기시대 전기~후기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점유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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