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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랑 고분(樂浪 古墳)
    역사 및 고고학 2022. 2. 26. 19:13

     한반도 서북한 지역에 분포하는 낙랑군 시기의 고분으로, 지역적으로는 청천강 이남에서 멸악산맥 이북 사이에 주로 분포한다. 고분이 가장 많은 곳은 토성동 토성의 남쪽 지역으로서, 일제시기 대동군 대동강면 정백리 · 석암리 · 오야리 · 토성리 및 남곤면 남정리 등에 해당하며, 현재는 평양 특별시 낙랑구역에 속한다. 해방 이전 일본인이 개략적으로 조사하였을 때에 2,000여 기의 고분이 있었다고 한다. 1907년 벽돌무덤(專築墳)을 발굴한 이래, 일제시기에 71기의 귀틀무덤과 벽돌무덤을 발굴하였지만, 57기만 고적조사 보고서 등에 소략하게 실려 있을 뿐이다. 북한에서는 1970년대까지 124기를 발굴하여 고고학자료집 등을 통해 보고하였으나, 1981~84년 사이에 발굴되었다고 하는 328기에 대해서는 아직 보고가 되지 않았다. 1990년 2월에서 1992년 12월 사이에도 통일거리 건설과정에서 2,200여 기의 고분이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이로써 대동강 남안의 고분군은 상당 부분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낙랑 고분은 묘제상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으로 나뉘는데, 이러한 묘제의 변화 과정은 한경(漢鏡)이나 기년명 칠기, 기년명 벽돌 등의 편년자료를 통해 볼 때 시간적인 흐름과 일치한다. 나무곽무덤(木槨墳)은 지하에 무덤구덩이(墓壤)를 파고 나무덧널(木槨)을 설치한 후 다시 나무널(木棺)을 안치한 무덤으로, 통상 방대형의 봉분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1기의 나무덧널을 단독으로 매장하는 단장(單葬)이 많았으나, 후에 2기의 무덤구덩이를 따로 파서 연결시켜 놓은 이혈합장(異次合葬) 형식으로 변하게 된다. 부장유물로는 세형동검과 함께 철제무기와 공구 및 거마구 등이 주종을 이루고, 화분형토기와 입큰항아리(廣口短壺)가 조합을 이루어 출토되는데, 유물의 전반적인 양상에서는 고조선 이래의 토착 적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B.C. 1세기 후반부터는 무덤구덩이 내에 귀틀곽을 넣어 만든 동혈합장(同穴合葬) 형식의 귀틀무덤으로 변화한다. 귀틀무덤은 지하에 무덤구덩이를 파고 바닥에 굵은 각재로 귀틀곽을 짠 후, 그 속에 관과 부장품을 넣고 나서 방대형의 봉분을 만든 것이다. 귀틀무덤은 내부 구조상 중간 격벽으로 2개의 널 안치공간을 구분한 형식, 널을 한쪽 모서리에 치우쳐 배치함으로써 'L'자형 부장구조를 만든 형식으로 크게 구분되며, 특별히 귀틀곽 주위를 벽돌이나 강돌을 이용하여 축조한 경우도 확인된다. 나무곽무덤에서 귀틀무덤으로 갈수록 청동용기, 장옥(葬玉), 기년명 칠기, 각종 장신구 등 중국 제품이 증가한다. 1세기대에 성행한 귀틀무덤에서 최고 수준의 무덤으로 석암리 9호분을 들 수 있으며, 그 외 널리 알려진 왕근묘(王根墓, 석암리 219호분), 왕광묘(王 光墓, 정백리 127호분), 왕우묘(王氏墓, 정백리 205호분) 등도 모두 귀틀무덤에 속한다.

     2세기 이후에는 벽돌무덤이 성행한다. 앞 시기 귀틀무덤의 경우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한 제한된 지역에서 축조된 반면, 벽돌무덤은 분포 범위가 급격히 확장되어 황해도와 평안남도 일대에 널리 분포하는 변화를 보인다. 벽돌무덤은 지하에 깊이 1m 정도의 무덤구덩이를 파고 내부에 장방형의 벽돌을 쌓아 무덤방(墓室)을 지상 위까지 올린 형식으로, 무덤방의 숫자에 따라 외방무덤(單室墓), 두방무덤(二室墓) 등으로 구분된다. 무덤방의 평면은 방형 또는 장방형이고, 무덤방의 벽선이 약간 밖으로 둥글게 휜 동장(胴張)구조인 것이 많다. 벽은 벽돌을 수평으로 3단, 수직으로 1단을 반복하는 소위 3횡 1수법(三橫一堅法)으로 쌓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부에는 널받침(棺臺)이 설치되어 있으며, 아치형의 널 길(道)이 달려 있고, 천장은 위로 갈수록 안으로 기울게 쌓는 궁륭천장을 이룬다.

     벽돌무덤이 축조되면서 명기(明器)의 부장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오야리 19호처럼 귀틀무덤의 마지막 단계에서도 일부 나타나지만, 벽돌무덤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명기는 마구를 비롯하여 살림살이와 관련된 부뚜막, 가마, 시루, 집, 울타리 등의 모형이 있고, 동물을 형상한 개, 돼지, 닭, 곰 등의 모형도 출토된다. 벽돌무덤에서는 연호(年號), 피장자 또는 축조자의 성명과 관직, 길상구 등을 새긴 명문전들이 발굴 또는 채집을 통해 다수 수집되어 무덤의 연대를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장무이묘(張撫夷墓, 348년), 동리묘(佟利墓, 353년)의 연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벽돌무덤은 313년 낙랑군이 멸망한 이후에도 서북한 일대에서 계속 축조되어 고구려 묘제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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