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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왕릉(慶州 王陵)
    역사 및 고고학 2022. 2. 20. 21:28

     경주에 신라의 왕릉으로 전하고 있는 것은 모두 36기이고, 경주를 벗어난 지역에 남아 있는 것은 경남 양산군에 있는 진성여왕릉과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경순왕릉이 있다. 따라서 신라의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모두 38기로, 이는 신라 역대 왕의 수가 56분인데 비해서는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경주에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36기 가운데 많은 것이 기록상의 위치나 시대적인 능의 형식과 차이가 있어 의문시되고 있다. 다만 능비가 남아 있는 무열왕릉만은 확실시되고 있으며, 기록상의 위치 비정과 시대적인 형식에 맞아 학계에서 공통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흥덕왕릉, 문무왕릉, 선덕여왕릉 정도이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왕릉들의 주인공이 부정되고 있는 것은 조선 영조 6년(1730)을 전후하여 그 이전에 전해 오던 10기(무열, 성덕, 헌덕, 혁거세, 미추, 법흥, 진흥, 선덕, 효소왕릉)에 갑자기 17기(진덕, 일성, 진지, 진평, 신문, 신무, 문성, 헌안, 헌강, 정강, 효공, 지마, 희강, 신덕, 경명, 경애, 아달라왕릉)가 더해지고, 최근에 다시 9기(경덕, 원성, 남 해, 유리, 탈해, 파사, 내물, 민애왕릉)가 더해져 전해지고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 편찬시 이전부터 왕릉의 주인공이 불확실 하였고 그 후 억측과 구전이 사실화되어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추사 김정희는 진흥왕릉고(眞興王陵)에서 왕릉으로 전해지지 않고 있던 서악리 고분군의 무열왕릉 뒤에 있는 대형분들을 진흥왕릉을 비롯한 김씨의 왕릉들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해방 후 정부에서 법정 지정시주인공의 고증보다는 법적 보호의 측면이 더 강조되면서 왕릉의 주인공에 대한 규명은 요원해졌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일찍이 화계 유의건(1687~1760)은 나능진안설(羅陵眞價設)』에서 “전혀 문헌에 의하지 않고 일시에 무식한 촌한의 말만 듣고 결정하였다”고 개탄한 바 있다. 신라의 왕릉에 대한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역사 기록의 고증과 고고학적인 연구 성과를 연계시켜 재검토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가지고 신라 왕릉을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신라의 고분은 널(棺)무덤단계(기원전 ~기원후 2세기 중엽), 덧널(槨)무덤단계(~4세기 전반 또는 4세기후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단계(~6세기 전반), 돌방무덤(石室墓)단계(~신라 말)로 정리되고 있으므로 마립간기의 이전 왕릉으로 비정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자료의 증가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다만 이들 가운데 오릉(박혁거세, 남해, 유리, 파사왕릉)과 미추왕릉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되고 있으므로 새로운 자료가 출현하여 신라고분의 편년이 상향조정되지 않는다면 이것들도 부정될 수밖에 없다.

    다음, 마립간기의 왕(내물, 실성, 눌지, 자비, 소지, 지증 왕)들은 대릉원과 그 주변에 분포하는 대형 돌무지덧널무덤 에 모셔진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즉 월성의 서북쪽 인교동에서 미추왕릉을 중심으로 한 대릉원을 거쳐 노동동과 노서동에는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들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들은 단일분의 저경이 80m가 넘거나 그에 육박하는 것들이 3 기(황남대총, 봉황대, 서봉황대)이고 대부분은 저경 45 ~ 50m 사이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들어갈 수 있는 대형이 인교동 119호분, 미추왕릉, 노서동 134호분 등 3기이다. 따라서 마립간기의 왕릉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황남대총을 내물왕릉으로 비정하고 있기도 한데, 내물왕릉에 대해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점성 대서남(占星臺西南)”이라 기록하고 있으므로 황남대총은 눌지왕릉으로 보고 내물왕릉은 첨성대 서남에 있는 인교동 119호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다음, 돌방무덤단계에는 왕릉들이 경주의 평지를 떠나 산지로 이동하였는데,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 왕릉급으로 추정 되는 고분들은 특히 둘레돌(護石)의 형태가 시기적으로 변천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둘레돌의 형태는 1)돌무지 덧널무덤의 둘레돌을 이어받아 돌담식으로 자연석을 쌓은 것, 2) 치석한 불럭형 또는 장대석을 쌓은 것 또는 여기에 갑석(甲石)과 지대석(地臺石)을 갖추어 기단화한 것, 3)거대한 판석으로 둘레돌을 만드는데 불탑과 같이 탱주(柱)와 면석(面石)을 구분한 것, 그리고 둘레돌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고 봉분 주위에 돌난간(石欄)을 돌리며 능의 앞에 문무석, 사자상, 화표석, 능비 등을 배치한 것 순으로 변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형식을 가지고 전기한 거의 확실한 왕릉들을 대입해 보면 무열왕릉(661)과 선덕여왕릉(647)은 1)형식에 흥덕왕릉(836년)은 3)형식에 해당한다. 따라서 1)형식은 대략 삼국통일 초 3)형식은 9세기 무렵에 유행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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